인천상륙작전 (맥아더·도쿄회담)

한국전쟁의 전황을 바꾼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봅시다!

-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대한민국 서울 서쪽 약 20㎞ 부근의 인천에 상륙하여 북한으로부터 서울을 탈환한 일련의 작전·전투이다. 작전 코드 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개인이 발안한 투기성 높은 대규모 작전을 맥아더 개인의 신념에 따라 실행하면서 한국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 개설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북한군이 계속 남진을 하면서 한국군·미군은 후퇴한다. 7월 31일 미8군은 방어 정면을 축소하기 위해 서남부 전선을 포기하기로 하면서 한반도 동남단 부산 주변의, 이른바 부산교두보로 내몰렸다.

맥아더가 입안한 크로마이트 작전은 서울 근교 인천에 기습 상륙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이와 연계해 부산을 지키고 있는 제8군을 진격시켜 남북에서 북한군 부대를 협공하는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9월 15일 실시, 유엔군은 인천을 확보한 데 이어서 서울을 북한군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한반도 남부에 대한 무리한 대공세로 피폐해져 있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보급로가 끊기고, 9월 23일 모든 부대에 북위 38도선 이북으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전장 이탈에 실패한 북한군은 부대 행동에 현저한 혼란이 빚어졌고, 그동안 수세였던 유엔군이 공세로 돌아서게 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전기의 중대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작전 계획

- 맥아더는 6월 29일 한강 남안의 최전선을 시찰했다. 비행기 바탄호에 의해 일본 하네다 공항을 떠난 맥아더는 서울 남부 수원 비행장에 착륙, 서울 근방까지 이동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을 만든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11차례 수륙양용작전을 지휘한 것으로 보아, 미군이 보유한 우위의 해·공군력에 의한 제공권 아래에 북한군의 배후로 우회, 보급선을 차단하고 남북에서 협공하여 일거에 공세를 바꿀 수 있는 이러한 작전방침이 좋다고 생각했다.

6월 30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은 미 지상군 투입을 발표하면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제24보병사단(사단장은 딘 소장)이 선발됐다.

7월 4일, 맥아더의 작전 방침에 따라 미 극동군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allory Almond, 1892~1979)] 소장 등이 계획한 [블루하트작전(Operation Blue Hearts)] 준비 명령이 당시 일본 간토(관동)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제병협동사단인 제1기병사단에 하달되었다.

 


이 작전은 7월 22일경 인천상륙을 실행할 예정이었으며, 제1기병사단은 7월 6일 요코하마에서 승선을 개시했다.

미군은 북한군을 [미군의 모습을 보면 흩어져 도망치는 쫄보 도적] 정도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적군·홍군으로 돌아가는 장교들에게 지휘가 이루어지면서 소련제 T-34 전차를 밀고 오는 북한군에 대해, 유효한 대전차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제24보병사단은 대파, 이에 간사이(관서) 지방에 주둔하던 제25보병사단(킨 소장)도 증파됐으나 북한군을 막지 못했다.

 

전황 악화로 인해 7월 10일 맥아더는 블루하트작전을 포기했고, 제1기병사단은 제8군의 증원으로 경북 포항으로 향하여 7월 18일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방어 전투에 가담했다.

맥아더는 블루하트작전을 폐지한 뒤에도, 육해공군에서 모은 상륙작전 전문가들로 통합전략계획작전 반을 편성해 작전 입안을 계속하였고, 7월 23일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발안됐다.

이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제8군과 연계해, 9월 중순에 제1해병여단 및 제2보병사단을 한반도 세 곳 중 하나에 상륙시킬 계획이었다. 이 3가지 안은 각각 인천 상륙을 100-B 작전, 인천 남쪽 150km 정도 떨어진 군산 상륙을 100-C 작전, 한반도 동쪽인 강원도 주문진 상륙을 100-D 작전으로 잡았다.

그러나 8월 5일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대공세(8월 공세)로 8군은 전력 부족이 심화, 상륙작전 예정 병력인 제1해병여단과 제2보병사단을 제8군 증원을 위해 부산에 파견하기로 했으나, 상륙작전의 연기를 더 할 수 없었다.

 

▼부산교두보 방어전이 장기화하면, 8군의 피폐로 인해 전선이 돌파될 위험이 증대된다.
▼인천에 대량의 기뢰가 부설되면 상륙작전을 할 수 없게 된다.
▼쌀 수확기인 10월까지 한반도 남부의 비옥한 경작지를 탈환하지 않으면, 북한군이 엄청난 농작물을 입수하고 만다.

등의 여러 가지 군사적인 필요성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강행하게 된다.

 

8월 12일 맥아더는 크로마이트 100-B 계획, 즉 인천상륙작전 발동을 하령했다. 상륙예정일은 1개월 후인 9월 15일로, 상륙부대는 미 본토에서 편성 중인 제1해병사단 및 일본 주둔 제7보병사단과 한국군 일부가 포함되며 공격목표는 인천·서울지구로 명시됐다.

8월 15일에는 크로마이트 작전의 입안에 관여한 통합전략계획작전반 요원들에 의해 제10군단 사령부가 편성되었고, 8월 26일에 정식으로 군단장 아몬드 소장의 지휘권 발동이 내려졌다. 이는 알몬드 소장이 미 극동군 겸 유엔군 참모장직을 겸한 채, 제10군단을 지휘하는 이례적인 인사였다.

 

미 해병대는 신속한 동원이 요구되었다. 미국 동부 해안의 제2해병 사단과 유럽 등에서 끌어모았던 베테랑인 제1해병 사단에 전속된, 예비역 10,000명 이상이 소집됐다.

1개월이 채 안 된 기간에 부대편성이 이루어졌고, 지중해에 있던 부대에서도 전용되면서 제7해병연대 제3대대가 될 해병대대는 8월 16일 그리스 크레타섬을 출발해 9월 9일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제7보병사단은 한반도의 전선부대로, 많은 인원이 차출되면서 9,000명의 정원이 부족하였으나 부산에서 징병 된 한국군 병사 8,000명이 요코하마에 상륙하면서 미군에 편입하여 인원수를 갖추며 훈련을 하였다.

2-1. 작전에 대한 반대

 

[인천의 승산은 오천 대 일이지. 하지만, 나는 내기를 이기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까] - 맥아더

- 워싱턴의 군 수뇌부는 맥아더의 북한군 배후지 상륙작전 자체는 지원했지만, 인천으로 장소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난색을 보였고 [브래들리(Omar Nelson Bradley, 1893~981)] 합참의장, [셔먼(Forrest Percival Sherman, 1896~1951)] 해군작전부장, [콜린스(Joseph Lawton Collins, 1896~1987)] 육군참모총장 등이 각각 강력히 반대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인천에 상륙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며 방어할 방법은 없다]고 판단했지만, 북한군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지 알 수도 없었고, 혹여 매복할 경우 유례없는 실패가 되어 맥아더의 명성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있었다.

맥아더 본인은 반대되는 이유를 [군 수뇌가 제2차 세계대전형 상륙작전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맥아더의 도박성 높은 작전을 시인하지 못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맥아더에게 상륙지점을 변경시키기 위해 셔먼 해군 작전부장과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 공군의 에드워드 중장을 도쿄로 파견했다.

 

2-2. 도쿄 회담

- 1950년 8월 23일 오후 5시 30분, 각 군 고위 관계자들이 모인 회담이 유엔군사령부가 소재한 도쿄의 다이이치생명 빌딩 6층에서 열리면서 맥아더에게 인천 상륙이 어렵다는 이유를 열거했다.

▼부산에서 420㎞ 떨어진 인천에 상륙작전을 해도, 남북을 겨냥한 작전으로는 거리가 너무 멀다.
▼맥아더가 요구한 병력은 주일미군 예비병력의 거의 전부로, 일본의 치안 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선봉에는 정예인 제5해병연대를 부산 교두보에서 철수할 필요가 있었으나, 이 때문에 부산 교두보가 약화하고 함락되어 버리면 상륙작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2개 사단으로는 병력이 부족해 각개격파의 위험이 있어, [안치오 상륙작전(The Battle of Anzio)]의 전철을 밟을 수 있으며 예비 병력도 없다.
▼인천항은 7만 병력과 장비를 상륙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상륙작전에 제8군의 보급용 선박을 전용함으로써, 만에 하나라도 작전이 실패하면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인천항은 간만의 차가 평균 6.9m로 매우 크고 최대 10m나 되며, 간조 시에는 항구 주변이 대략 3.2km의 갯벌이 되어 버린다.

특히 이 간만의 크기는 해군이 반대하는 큰 이유였다. 폭 2km 남짓, 길이 90km의 수도 이외에는 접근 경로가 없었고, 수도가 기뢰에 의해 봉쇄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작전 실행은 대조로 조위가 가장 오르는 9월 15일, 그것도 아침저녁 2회의 만조 시각 2시간에 상륙을 시행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10월 이후는 현계탄(대한해협)·황해의 계절풍 영향으로 연기가 곤란했다.

 


또, 작전 의도가 북한에 포착될 경우 작전 실행 일자는 물론이고 실행 시간까지 특정하기 쉬웠다. 인천항 입구에는 견고하게 방어된 월미도가 있어 상륙작전에 앞서 이 섬을 점거해야 했으나, 사전 제압사격이 필요해 기습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상륙용 주정의 접안에 마땅한 백사장도 없어 병사들은 5m 높이의 암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또한, 상륙지점 일부는 인천 시가지 빌딩가 정면의 안벽으로 시가지 직전에 직접 상륙해야 하므로 건축물이 큰 장애를 초래할 수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은 인천상륙작전 반대와 함께 군산상륙작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군산은 부산 교두보와 가깝고, 지형적·해상적인 문제점도 없었다. 셔먼 해군 작전부장은 이에 즉시 동의했고 참석자들의 발언은 끝났다.

맥아더는 이번 설명에도 질문을 거의 하지 않고 다 듣자,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의 퀘벡 전투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퀘벡을 방어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해, 공격 측인 영국군이 지형 장애 극복과 기습효과로 승리를 거두어 전쟁 종결을 이끈 고사를 인용해 작전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45분간의 대연설을 했다.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상륙이 어렵다는 것은, 반대로 상대가 상륙을 예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형적·해상적 물리적 장애는 난점이긴 하지만, 해군의 능력을 볼 때 불가능하지는 않다.
▼군산 상륙은 적의 보급선 차단으로 이어지지 않아, 결정적 전과를 얻지 못해 8군이 부산 교두보를 지키는 상황은 여전하다.
▼북한군의 보급선은 한번 서울을 통과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 서울을 탈취함으로써 한반도 남쪽의 북한군에 대한 보급을 차단할 수 있다.
▼동서 대립의 최전방인 한반도에서 패배하는 것은 유럽에 악영향을 미친다.

육·해군 수뇌는 이러한 맥아더를 설득하지 못한 채 귀국했고, 맥아더에게는 8월 29일 합참으로부터 인천 상륙에 동의하면서도 군산상륙작전을 [기대]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도 맥아더의 결단은 변하지 않았고, 8월 30일에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육·해군 수뇌의 설득을 뿌리치는 형태로 하령했다.

그런데, 직후인 8월 31일 밤부터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되면서 제8군은 곳곳에서 전선이 침식돼 예비병력을 모두 투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쿄·워싱턴에서는 비관론이 확산했고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다부동 전선으로의 후퇴도 논의됐다.

 

당시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99~1950)] 중장은 인천상륙작전에서 1진을 맡기로 했던 제5해병연대를 영산 전선에 투입했고, 이에 반발한 해병대와 갈등을 빚었다.

워싱턴의 부산방위 전망에 대한 우려는 깊었고,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9월 5일 맥아더에게 작전 변경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9월 6일 맥아더는 계획 변경이 필요 없다는 뜻을 답신했다.
브래들리는 이후에도 작전 변경을 요구했지만, 맥아더의 뜻을 꺾지 못했고 9월 9일 인천상륙작전은 승인됐다.

 

3. 기만·양동 작전

 

- 일본 본토인 고베나 요코하마 등지에서 보급품의 집적과 LST 등의 의장변경, 상륙부대의 집결과 승선이 대규모로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항만작업을 스파이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상륙 시기나 병력은 북한 측에 알려진 것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상륙지점의 은닉이 중요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상륙작전 2주일 전부터 군사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엔군에 의한 인천 상륙이 알려졌다.

작전 참가를 위해 낙동강 돌출부에서 철수시킨 미 제5해병연대는 부산에서 상륙 준비를 했는데, 이때 대원에게는 군산상륙작전이라고 통보했고 부대 내에는 군산의 지도와 모형이 비치되었으며, 스파이를 상정해 이것을 기지를 출입하는 한국인들이 보이는 곳에 고의로 놓였다.

대원들에게 인천 상륙을 가르친 것은 수송함이 해상으로 나간 9월 14일 오후였다. 수송선이 부족했던 미국이 일본 정부에 요청해 수송하기로 한 일본 민간 선박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전투에 참여하게 됐다.

 

미국 제5공군은 인천 주변을 폭격함과 동시에, 9월 5일부터 9월 13일까지 군산 주변 50㎞의 교통망을 인천 인근으로 폭격한 것과 같은 규모의 폭격을 시행했다.

군산에는 미군·영국군의 상륙작전을 포고하는 전단이 살포되었고, 9월 12일에 영국 함대의 지원 아래에 미국·영국의 부대가 위력정찰을 위한 강습 상륙을 감행하였다.

9월 13일 전함 미주리와 몇 척의 구축함은 한반도 동해안의 북한군 요충인 삼척 주변 포대와 해안진지에 대한 상륙 준비를 기만하는 함포 사격을 했다. 또, 영국 항공모함 트라이엄프와 중순양함 헬레나가 평양 외항인 진남포 일대에 함포 사격과 폭격을 했다.

맥아더가 AGC(상륙 지휘함)인 마운트 매킨리를 타기 위해 도쿄에서 출발하는 첩보도 은닉되었으며, 측근인 GHQ 민정국 국장 등과 함께 맥아더 일행은 전용를 타고 도쿄에서 이타츠키 기지로 이동해 육로로 사세보 기지로 향했지만, 해당 기지들은 맥아더 일행의 내방을 통보받지 못했다.

9월 11일 오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미 해군 [도일(James Henry Doyle, 1897~1981)] 제독과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1893~1977)] 소장 등을 태우고 고베에서 출항한 마운트 매킨리는 9월 12일 밤, 사세보에 기항해 맥아더 등을 승선시키자마자 곧바로 출항했다.

 

 

4. 정보 수집

- 상륙작전 개시 전에 한국군·미군 모두 인천지구 도서에 첩보부대를 보내 정보를 수집했는데, 인천상륙작전을 기대했던 이승만 등 대한민국 정상들은 첩보부대를 보내기로 했고, 인천 남남서쪽 약 22km 떨어진 영흥도에 한국 해군본부 정보국장 [함명수(1928~2016)] 소령이 파견됐다.

장교·부사관·사병 등 17명으로 구성된 첩보부대는, 미군이 작전하기 쉽도록 [유리한 형태의 정보]를 보고하도록 요구받았으며 8월 23일, 이들은 영흥도에 도착하자 지역주민들로 의용대를 조직하여 대비태세를 갖추고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해로·인천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북한군 병력, 기뢰의 배치현황, 암벽 높이 등을 조사하였다.

맥아더 등은 한국군이 배치해 보내는 [유리한 정보]에 환희했으나, 이 정보를 [미군의 눈]으로도 재확인할 필요성을 느껴, 미군에서도 요원을 보낸다.

 

잠행 요원인 미 해군 [유진 클락(Eugene F. Clark, 1911~1998)] 대위와 통신병, 통역 한국인 2명 등 총 4명의 일행은 8월 31일 영국 해군 구축함 HMS Charity가 사세보에서 출발하자, 덕적도 앞바다에서 한국 해군함과 도민들의 협조 아래 낮에는 몸을 숨기다가 밤이 되면 인천항 주변의 정찰, 적의 방어를 확인했다.

 


클락 대위는 인천항 전면에 있는 월미도에도 주민들을 보내 화포 배치 상황 등을 정밀히 조사했는데, 이러한 첩보 활동을 통해 수집된 정보는 과거 인천에 근무했던 미군 관계자에 대한 청취, 항공사진 분석 등을 거친 뒤, 상륙용 주정에서 직접 암벽을 오르기 위한 알루미늄제 사다리가 오사카시 요도가와구의 일본 알루미늄에서 발주되었다.

클락 대위는 9월 15일 0시에는 인천항으로 진입하는 수로를 가리키는 팔미도 등대에 잠입한 뒤, 이를 점등해 상륙함대 1진을 유도했고 이 공로로 클락대위에게는 [해군 십자장(Navy Cross)]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대가로 북한 병사에 의해 영흥도 주민 약 50명이 간첩 혐의로 처형당하는 희생을 겪었다.

 

 

5. 북한군 상황

 

- 북한군 예비병력은 격전이 계속되고 있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고 있었으며, 후방에는 보급부대와 규모가 작은 경비부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북한군은 서울·인천 지구에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해 경비대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인천지구에서는 인천시가지에 북한 제9사단 제87연대와 월미도에서 본토 사이의 제방에 북한 제884부대의 일부, 월미도에는 제226독립육전대 3대대 중 1개 중대 및 제918해안포연대 1개 중대 총 400명, 총 2,0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월미도는 요새화가 진행, 주변 도로는 철조망과 함께 지뢰도 매설됐다. 산허리에는 동굴이 굴착돼 해안포 포대가 구축되었으며, 서울에는 약 5,000명이 배치되어 서울 및 인천 지구 전체에 약 1만 명의 병력이 존재했다.

북한 해군에는 초계정 부대가 존재했지만, 유엔군의 봉쇄로 무력화된 상태였고 북한 공군은 잔존 19기로 유엔군의 작전을 방해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6. 상륙 작전 개시

 

-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전으로 인천항 앞에 있는 월미도의 점령이 필요했다. 북한군이 전개한 포병부대는 동굴 진지에 해안포를 배치했는데, 월미도의 북한군 진지는 인천항 접근 시 통과하는 비어수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으나 정작,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9월 10일, 호위 항공모함 USS Badoeng Strait, 호위 항공모함 USS Sicily에서 출격한 F4U 콜세어가 네이팜탄을 투하해 민가나 창고 대부분이 소실했으며, 다음날인 11일과 12일에도 소이탄 공격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면서 해당 섬은 불타버렸다.

9월 13일 오전 7시, 제9구축대 구축함 6척에 중순양함 2척, 영국 해군 경순양함 2척 등 총 10척이 각 함의 거리 630m의 단종진으로 비어수로에 진입했고, 동시에 월미도에는 공습이 시행됐다.

중순양함, 경순양함 등 4척은 인천 남쪽에 투묘, 제9구축대는 헨더슨을 기뢰 감시와 처리에 남겨두고 나머지 5척 구축함은 월미도 서쪽 720m까지 접근했다.

제9구축대는 해안포와 1시간 남짓한 지근탄 다수를 받는 포격전을 벌였는데, 콜레트가 9발을 맞으면서 함대 전체로는 전사 1명, 부상 8명의 인적 손해가 발생했다.

이후 순양함 4척이 추가로 함포사격을 했고, 다음 날인 14일에도 같은 함포 사격이 이루어졌지만, 이때만 해도 북측의 반격은 거의 없었다.

9월 15일, 이날 첫 번째 만조 시각에 맞추어 오전 6시 30분에 제1해병사단 제5해병연대 제3대대는 월미도 북서안에 상륙해 북한군 400여 명이 동굴 진지에서 반격에 나섰으나 섬은 45분 만에 확보됐다.

본격적인 인천항 상륙은 이날 두 번째 만조에 맞춰 오후 5시 30분에 시작됐다. 제1해병연대는 인천 남지구 갯벌(블루 비치)에 상륙, 제5해병연대는 높은 안벽이 있는 인천 북서부(레드 비치)에 상륙했다.

상륙 3파까지 반격은 이뤄지지 않았고, 해가 지면서 북한군 수비대는 철수했으며 이 성공으로 나머지 10군단과 7보병사단이 기갑 포병부대와 함께 적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 2만 5,000명의 병력이 이날까지 상륙했다.

심야에는 제5해병연대 제2대대가 서울-인천을 잇는 가도까지 진출했으며, 제1해병사단이 상륙 첫날 입은 손해는 전사 20명, 부상자 174명이었고 인천지구에서 마중(?) 나온 북한군은 500명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병력 6만 5천 명에 60여 량 이상의 M26 중전차가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7. 인천 상륙 후

- 15일 밤,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해 낙동강 방어선 제8군에서도 슬레지해머 작전이 하달돼 16일 0시에 발동을 명령받았다.

상륙 이틀째인 9월 16일, 제5해병연대는 김포 비행장·제1해병연대는 서울-인천 가도 제압을 개시하였으나 여전히 북한군의 반격은 산발적이었다. 제1해병연대 8량의 M26 중전차가 6량의 T-34-85 전차를 만났으나, 단시간 전투에서 T-34는 격파됐다.

상륙 사흘째인 9월 17일, 제5해병연대 2대대가 김포 비행장을 무사히 탈환했고 제7보병사단은 제8군과의 합류를 위해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이날 북한 공군의 2대의 Yak-9가 인천항 밖 상륙함대를 공격했고, 중순양함 로체스터와 영국 경순양함 자메이카가 손상됐다. 9월 18일에는 한반도 동해안에서 양동 작전을 마친 전함 미주리가 회항하며, 7보병 사단에 대한 지원 포격을 개시한다.

김포 비행장에서 서울까지는 약 13㎞로, 그 사이로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서울로 향했다.

제1해병연대는 북한군 제70연대 87연대와 전투를 치르면서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에 도달했고, 제5해병연대는 한강을 도하한 뒤 서울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곳에서 고지에 전개하는 북한군과 백병전을 치르면서도 9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9월 26일 대구에서 북쪽으로 진격한 제1기병사단은 오산에서 제10군단과 합류했다. 제1해병연대는 9월 26일 심야부터 27일에 걸쳐 시가전을 시행, 28일에는 의정부시에 도달한다.

다음날, 소규모 반격이 행해진 것을 마지막으로 전투는 종결. 9월 29일 서울의 탈환은 거의 완료되었고, 이승만 등 대한민국 정상들도 서울로 귀환하였다.

 


보급부대가 빈약했던 북한군은 38선에서 300km 이상 떨어진 부산 인근 전투로 크게 소모되고 있었고, 병력의 3분의 2가 실제론 강제 징집한 신병으로 항명 즉시 사살 명령으로 부대가 유지된 상태였다.

북한군의 보급로는 한반도의 도로망상, 서울을 한번 통과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보급로가 크게 끊기게 되면서 괴멸적 손실을 당한다.


* 더 자세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얘기와 영상은 아래 바로가기를 참고해주세요.

[나무위키 인천상륙작전]

[위키피디아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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