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 연속듣기 (30주기)
최연소 싱어송라이터 장덕 현이와 덕이 무료듣기
- 추억의 가수이자 최연소 싱어송라이터였던, 그러나 만 28세라는 아름다운 청춘의 시기에 덧없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가수, 장덕을 아십니까?
이번 시간에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중후반,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드물던 그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나 시대의 편견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이겨내었던, 장덕 연속듣기를 여러분께 제공하고자 합니다.
마침, 올해는 장덕이 세상을 떠난지 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포스팅이 되겠네요.
(참고로 한국 음악계의 가인(歌人) 김현식 씨도 올해가 딱 30주기 입니다)
1. 장덕 프로필 & 생애
- 본명: 장덕
- 생몰년도: 1961년 4월 21일~1990년 2월 4일 (만 28세)
- 출생지: 서울특별시 중구
- 국적: 대한민국
- 직업: 가수, 싱어송라이터, 작사가, 작곡가, 음반프로듀서, 배우
- 활동시기: 1975~1990년 (중간에 활동 휴식기가 있었음)
- 가족: 아버지, 어머니, 오빠 장현(1956~1990)
- 학력: 안양예고 > 테네시주립대학교 실용음악학과
- 신체: 158cm, 46kg, O형
- 데뷔: 1975년 꼬마인형
-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로 활동하던 아버지와 서양화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클래식 음악에도 관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오빠 장현과 장덕은 각각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면서 어릴때부터 음악에 친숙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때 부모님의 불화로 이혼하게 되자, 장덕은 고모집에 맡겨지게 되고 오빠 장현은 아버지 친구집에 맡겨지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진다. 게다가 초등학교 3학년때, 장덕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다가 교통사고 까지 당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이었다.
1971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장덕과 장현은 도봉산의 어느 청기와집에서 1년 정도 살면서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이때 장덕은 오빠에서 처음으로 기타를 배우게 된다. 그 뒤, 1972년 장덕 가족은 북한산 기슭의 조그마한 집으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장덕은 가정교사로 바쁜 오빠와 매일 어디론가 술 마시러 쏘다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늘 홀로 남겨져 예민한 감수성으로 깊은 외로움을 혼자 씹어 삼겨야했다.
1973년 새 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전혀 나아지지 않았던 장덕은 한때 음독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도 시도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장덕에겐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요 경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고, 이때부터 오빠 장현이 준 기타로 작곡을 시작하면서 갖가지 악기도 다루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짓기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974년 서울 사범대 부속중학교에 입학한 장덕은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가출과 음독을 시도하는 등 방황하게 된다. 그러자 이를 걱정한 어머니가 장덕이 이러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고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키우고자, 오빠인 장현과 함께 드래곤 래츠(Dragon Rats)라는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준다.
참고로, 듀엣명은 당시 장덕 남매를 엠버시 클럽에서 열렸던 미8군 주최 파티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도와준 미8군 관계자 엘 클리나드가 붙여준 듀엣명이라고 한다.
1975년 4월, 중학교 2학년의 나이로 오빠인 장현과 함께 상기한 미8군 주최 파티에서 [To Be A Child Again]이라는 곡으로 데뷔한다. 여기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출연계약까지 정식으로 요청받으면서 장덕의 음악적 재능이 조금씩 주목받게 된다.
여기서 방송국 PD들의 주시를 받게된 장덕 남매는 방송국에도 스카우트 되면서, 같은 해 5월에는 TBC TV의 [오라오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였고 여기서 장덕이 작사·작곡한 [꼬마인형], [일기장]을 부르면서, 당시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방송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때의 음악적 재능으로 작사와 작곡에 능한 [천재소녀]로 평가받게 된 장덕은 1976년, 그 재능 덕에 안양예술고등학교에 1년 빨리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현이와 덕이]로 듀엣명을 변경,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등 3곡이 수록된 [친구야 친구]를 발표하게 된다.
그 뒤, 현이와 덕이는 전영록, 이덕화, 임예진 주연의 [푸른교실]의 OST에 자신의 노래들이 실렸으며, 1977년 4월에 장덕은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등 바쁜 연예계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집들이에서 가수 송창식을 만나게 되면서 또 다시 한단계 도약하게 된다.
송창식의 지원으로 서울국제가요제(이 당시에는 MBC 서울가요제)에 출품하기 위해, 당시 신인가수였던 진미령의 작사·작곡가로 출전해 당시 빵모자를 쓴 앳된 모습으로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시청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입상에도 성공한다.
이후, 10여편의 영화 출연과 작사·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큰 인기와 사랑을 이미 10대 시절부터 누렸으며 1978년에는 정규 1집도 발표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이때 3년 연속으로 서울국제가요제 입상하는 기록도 세운다.
이 와중에 오빠 정현은 작사가 천봉의 딸인 천인실과 결혼을 하였고, 잠시 오빠 집에 같이 살던 장덕은 1979년 10월에 월세방을 구해 혼자 살게 되는데, 외로움에 너무나도 약한 장덕은 다시 극단적 선택을 기도한다. 그러자 장현·아버지 가족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
그러다가 1980년 10월, 개인적인 문제로 어머니가 살고 있던 미국 테네시 주 내쉬빌로 떠나면서 잠시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하였고, 대학교를 다니면서 내쉬빌 한인밴드에서 활동한다. 이때 해당 밴드 멤버였던 이승언과 1981년 10월 결혼하였고 지역 한인회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점차 한국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면서 전자 포커게임으로 한학기 등록금을 날려먹는 등,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1983년 10월엔 2년 만에 이혼까지 하면서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랑 메모 한 장만 남긴 채 한국으로 귀국한다.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장덕은 같은 해 11월, 서라벌레코드와 3년에 1,000만 원이라는 저렴한 조건으로(현재의 가치로 따져봐도 3,500만 원 밖에 안됨) 어렵게 소속사와 계약을 맺게 된다. 아무래도 몇 년의 공백기간으로 그새 잊혀진 상태였다.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한 장덕은 솔로 정규 1집인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하면서, 본인이 방송 출연을 꺼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앨범의 동명곡이 1984년 5월 한 달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분 3위까지 오르는 등,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후에도 작사·작곡과 음악감독, 2집 앨범을 발표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이번에는 반응이 거의 없었고, 예전과 다른 연예계와 혼자서 모든 걸 해나가야 한다는 점에 장덕은 또 다시 괴로워하면서, 식음을 전폐하는 등 혼자서 끙끙 앓는다.
보다 못한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장덕을 찾아가 다시 한번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 할 것을 제안하게 되고 그 해 6월에 7년 만에 재결합하게 된다.
다시 결성된 현이와 덕이는 정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발표하면서, 가요순위 10위 안에 드는 등 다시 한번 인기를 끌게 되었고, 1986년 5월에는 가수 이은하에게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내 그 모습처럼]이라는 명곡을 작곡 해 주면서 음악적 재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뒤, 다시 솔로 활동을 펼치면서 정규 3집 [님 떠한 후]를 발표하면서 KBS 가요톱10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89년까지 정규 6집을 내면서 활발하게 솔로 활동을 펼치던 장덕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오빠 장현이 설암 3기 판정을 받게 된다. 평소 지나친 음주와 흡연이 원인으로 여겨진 해당 질환으로, 잠시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숨기던 장현은 결국 동생에게 털어놓게 된다.
장덕은 자기때문에 오빠가 병에 걸린 것이라 여기면서 죄책감을 갖게 되었고, 활동을 중단하면서 오빠의 병간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수면제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1990년 1월 20일에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2시 50분,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5동 1008호에 거주하던 장덕은 당시 복용하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의 약을 일시적으로 과다복용하면서 이상증세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의상 담당이었던 문인옥이 발견해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 날 숨지고 만다. 향년 만 28세 였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문인옥은 장덕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몸에 기운이 없다]며 평소 복용해오던 상기한 약들을 복용하고 잠들었다가, 잠시후 깨어나 비틀거리면서 화장실을 드나들다가 상황이 악화되자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당시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날 대신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라고 고백하는 등,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였고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장덕의 영결식에서 함께한 가수 50여 명도 오열하며 슬퍼했다.
그 뒤, 오빠 장현도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난지 불과 6개월 여 만인 8월 16일 오후 4시 20분 경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향년 만 34세의 젊은 나이에 악화된 설암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2. 장덕 연속듣기 (무료듣기)
- 이렇듯, 장덕은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으나 그녀가 남겨놓은 음악적 재산은 현재까지 한국 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선 많이 잊혀진 추억의 가수 정도의 인식이라서 안타깝습니다.
이번에는 장덕 연속듣기로 그녀의 음악세계를 조금이나마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명곡을 남기고 떠난 싱어송라이터 장덕 노래모음
2. 장덕노래모음 30곡
2-1. 장덕 연속듣기 (대표곡 모음)
1. 님 떠난 후
2. 이별인 줄 알았어요
3. 소녀와 가로등
4. 날 찾지 말아요
5.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6. 그러지마
7. 사슴여인
8.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수 있니
9. 혼자 부르는 노래
10. 사랑하지 않을래
11. 보고싶지 않으세요
12. 가을에 만난 소녀
13. 이런게 아니었는데
14. 당신은 나
15. 앵무새
16. 어느 날
17. 너를 사랑해
18. 비가 내려요
19. 묻지 마세요
20. 사랑하는 그대가 날 위해 눈물을 보일때
3. 마무리
- 장덕 연속듣기 괜찮으셨나요? 어느덧 세상을 뜬지 3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 가요계는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BTS를 위시한 K-POP의 약진으로 한류는 아시아권에 한정된 매니아 층의 음악에서 영미권에도 어필이 되면서 또 하나의 주류음악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중 입니다.
지금의 영광이 탄생한 배경에는 분명히, 이런 선구자 급의 멋진 가수들이 기반을 닦아나가면서 한국 음악계의 질적인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어설픈 지식으로 감히 평해봅니다.
[지식백과]
[유용한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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